AI가 뺏은 일자리인가, 싱가포르 영화 논란

 

싱가포르에서 AI로 제작한 SF 영화 ‘트레이스 프로젝트’가 건국기념일 상영 후 거센 비판을 받았다. 영화감독 필립 림은 CNA 논평에서 AI가 만드는 결과물이 아니라 제작 방식을 바꾸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썼다.

 

논쟁의 발단

‘트레이스 프로젝트’는 제작사 피즈드래곤이 만든 64분짜리 SF 영화다. 2030년대 후반 지구 생태계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공공주택에서 자란 평범한 청년 린자쥔이 싱가포르 최초 우주비행사로 선발돼 화성 이주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야기다. 인지 브레인링크를 통해 지구에 남은 첸후이민과 실시간으로 감정을 공유하지만, 화성은 약속된 땅이 아니라 생존 시험장이었다는 설정이다.

 

 

▲ 피즈드래곤 공식 채널이 공개한 예고편

 

8월 9일 건국기념일에 골든빌리지 비보시티에서 단 한 차례 공개 상영됐다. 팍스 첸 피즈드래곤 대표는 상영일이 싱가포르 영화협회 고위 인사의 제안이었다고 밝혔으나, 케네스 탄 협회장은 스톰프에 협회가 상영 시기에 대해 누구에게도 제안한 바 없다고 답했다.

 

비판은 예고편 단계부터 시작됐다. 온라인에서 ‘AI 슬롭’이라는 표현이 붙었고, 작가 겸 감독 아빈드 제이는 8월 7일 인스타그램에 이 상영이 평생을 업에 바친 싱가포르 예술가 수천 명에 대한 모욕이라고 썼다. AI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상영 후 반응도 갈렸다. 한 틱톡 이용자는 상상보다 나빴고 볼 수 없는 수준의 장면이 있었다고 평했다. 머더십 기자는 21.50싱가포르달러를 내고 관람한 뒤 상당히 별로였다는 제목의 후기를 썼다. 반면 상영에 참석한 다프네 네오는 인스타그램에 훌륭한 AI 영화였다고 적었다.

 

머더십에 따르면 상영 당일 피즈드래곤이 초청 관객에게 티켓을 배부하는 모습이 관찰됐다. 첸 대표는 관객의 절반가량이 티켓을 구매했고 나머지 절반은 초청이었다고 밝혔다. 상영 전에는 테오 호 핀 전 국회의원이 무대에 올라 이 영화가 창의적으로 꿈꾸도록 자극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제작사의 입장

첸 대표는 모든 새로운 제품이 옛 잣대로 평가받으며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마차보다 느렸다는 비유를 들며, AI가 마부의 손을 자유롭게 했다고 표현했다. AI를 슬롭이라 일축하는 사람들은 지금 세계 AI 창작 경제의 규모와 그것이 만들어낸 일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제작 규모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피즈드래곤의 이전 장편 ‘해적 여왕: 정일사오’는 13개국 130명 이상의 창작자가 참여했다. ‘트레이스 프로젝트’는 3개국 10명가량이 만들었다. 첸은 이를 소규모 팀이 새로운 창작 기술로 기존 제약을 넘을 수 있는지 시험한 실험이라고 설명했다.

 

첸 대표는 싱가포르국립대 전기공학 전공자로, 이 이야기가 자신이 직접 쓴 소설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피즈드래곤은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AIGC 영화 제작사로 소개한다. 상영 이후 자사 앱에 영화를 공개했고, 말레이시아와 미국 등지의 배급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림 감독의 논점

필립 림 감독은 이 논쟁이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창작자가 그 기술을 어떤 의도로 쓰는가의 문제라고 봤다. 그가 제시한 사례는 자신이 제작 중인 단편이다.

 

이 작품은 AI로 생성한 영화가 아니라 실제 배우가 버추얼 프로덕션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이다. 버추얼 프로덕션은 여러 부서가 동시에 참여하기 때문에 촬영 전에 모든 구성원이 감독의 의도를 공유해야 한다. 가상 배경을 구축하고 카메라 위치와 렌즈를 정하는 작업을 미술, 촬영, 버추얼 프로덕션 팀이 몇 달 전부터 함께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조감독이 AI를 써서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일자리를 대체한 것인가

림 감독은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AI가 그 작업을 했으니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인가.

 

그의 답은 아니오다. 애초에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를 고용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용했다면 모든 숏을 상세히 설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했을 것이고,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이 직접 졸라맨 수준의 그림으로 때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즉 AI가 대신한 것은 사람의 일자리가 아니라 감독이 혼자 대충 그렸을 낙서라는 뜻이다.

 

불필요한 작업을 자동화하는 것과 기존 직업을 대체하는 것은 다르며, 이 구분이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쉬워지는 것과 좋아지는 것

림 감독은 AI가 제작을 쉽게 만들 수는 있지만 결과물이 반드시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나쁜 영화는 새로운 기술로 만들었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지 않는다.

 

AI를 둘러싼 논쟁의 밑바닥에는 인간 창의성의 가치에 대한 불안이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의의 및 전망

제작사와 비판자가 근거로 든 것은 서로 달랐다. 제작사는 제작 규모와 접근성을, 비판자는 완성도와 업계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았다. 머더십 기자는 각본이 사람이 썼다는 점을 들어 이야기 자체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평하면서, 박찬욱의 전환이나 왕가위의 스텝프린팅 같은 연출적 요소는 사람의 손에서 나온다고 썼다.

 

림 감독이 제시한 구분은 국내 제작 환경에도 적용된다. AI가 없었으면 아무도 하지 않았을 작업인지, 사람이 하던 일을 대신한 것인지를 사안별로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구분은 감독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어, 발주자와 수주자의 이해가 갈리는 현장에서 어떻게 합의될지는 별개 문제다.

 

📅 원문 날짜: 2026년 8월 14일 | 출처: CNA, Mothership, Stomp